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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yJjdCI6Ikl1aUluSGo5S2Q3cHlaaHBod3FuK2J5ZnJ3WDNLUXRYQlowSGtqZWVCa2c9IiwiaXYiOiI4YWRkMWVkY2JmY2ZiMDM0MjM0YmRlYTJjOGQ3MDUxMSIsInMiOiI3ZmQyMGE5YjllNGVlNmQ2In0=| 등록일 : 2018.05.07 |조회수 : 623 |추천 :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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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73:16-17 “그것이 내게 심한 고통이 되었더니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사람들에게는 누구나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는 나름대로의 주관이 있습니다.
이 주관은 성장 과정에서 살아가는 배경에 영향을 받아 서서히 굳어지게 됩니다.
이 주관은 때로 편견이 될 수 있어 관점의 차이가 있으면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하는 성향으로 나타납니다.
어느 두명의 유대인이 유대인 회당으로 가던 중 대화를 나누다가 기도 중에 담배를 피우면 어떻게 되는가에 대한 토론을 벌입니다.
결론을 내리지 못한 그들이 랍비에게 묻기로 하고 두 사람이 같이 랍비를 만납니다.
“기도 중 담배를 피울 수 있나요?”하고 물으니 랍비가 펄쩍 뒤며 역정을 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신성한 대화인데 어찌 담배를 핀단 말인가? 안 되네.”
그러자 다른 사람이 묻습니다.
“담배를 피다가 하나님께 기도드릴 수 있나요?”
랍비가 대답합니다.
“기도는 24시간 어느때나 언제든지 할 수 있는 것이라네...”.
메시아로 잔뜩 믿었던 예수께서 돌아가시자 절망 가운데 엠마오로 향하여 가던 두 제자가 길을 가던 중 부활하신 주님과 동행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가 누구인지 그들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눈이 가리워져 있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예수님이 이상해지신 것이 아니라 두 제자의 눈에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죽은자가 다시 살아날 수 없다는 선입견이 그들의 시각을 지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그들의 눈이 밝아져 부활하신 주를 알아보았습니다.
시각의 변화입니다.
아삽의 시는 우리에게 영적 도전을 줍니다.
악인들의 형통하는 모습과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의 곤고함에 대한 대조적인 관측을 보이고 있습니다.
어찌 그럴 수가 있느냐는 항변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복받고 잘 되어야하는데 왜 이리 고난 가운데 있고 오히려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은 모든 일이 잘 풀리는 것이냐?
우리는 항변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세상적인 행복의 관점에서 자신들의 상황을 바라보던 시편기자는 결국 성소에 들어가 그 실상을 보게 됩니다.
종말론적 신앙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것을 시편기자는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다”고 표현합니다.
오늘 내가 주변을 바라보는 나의 시각은 어떤 것입니까?
혹시 나다나엘처럼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느냐?”는 편견의 안경은 아닙니까?
주변 사람들을 바라볼 때나 어떤 일울 대할 때 편견의 안경을 낀 채 바라본다면 분명히 굴절된 모습으로 투영될 것입니다.
나의 주관된 잣대로 남을 판단할 때 우리는 객관성을 잃고 판단하여 굴절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예배 가운데 우리의 실상과 하나님의 시각을 회복할 때 이러한 편견의 안경을 벗을 수 있습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시각을 회복하는 system입니다.
세상과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라는 하나님의 초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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