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누군가에게 복음을 전달받고 신앙이라는 새로운 인격을 접할 때 그 누군가가 어떤 분이었나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신앙 형성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어떤 분은 물론 부모님일 수도 있습니다. 모태신앙으로 형성되는 경우입니다.
그러나 남다른 만남 가운데 복음이 소개되어 신앙의 세계를 접하신 분들은 그 만남의 순간들이 갖는 의미가 평생토록 남아있고 기억될 뿐만 아니라 영원의 세계를 좌우할 때도 있습니다.
그토록 영향을 끼치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우리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가만히 있어도 빛이 되는 삶입니다.
내가 필요하다고 느끼는 곳에서만 빛을 발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있는 곳이 어디이든지 관계없이 빛이 비춰지는 빛입니다. 그러니까 손전등이 아닙니다. 손전등은 내가 비추고 싶은 곳에만 비출 수 있습니다. 사용자에 의해 조종됩니다.
아이들이 손전등을 갖고 놀 때 서로에게 비추고 자기 얼굴에다 비추는 “빛놀이”가 벌어질 때가 많습니다. 교회에서 비추는 손전등이 마치 이와같이 서로에게만 비출 때가 많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진정 영향력을 미치는 빛은 “내 안에 사는 이”가 저절로 드러날 때입니다.
“내 안에 사는 이”라는 미국 찬양을 처음 들었을 때의 그 감동을 아직도 잊지 못합니다. 중저음과 베이스의 묵직한 보이스가 어우러졌던 이 찬양 “Christ in me is to live”은 저절로 눈물을 자아내게 하고 그 의미를 마음에 새기게 되는 찬양이었습니다.
당시에 존경하던 이중표 목사님의 “별세신학”이란 책을 깊이 읽던 때라 더 마음속 깊이 다가왔는지 모릅니다. 그러면서 늘 제자신을 경계하게 된 이미지가 바로 손전등입니다. 손전등은 사용자에 의해 그 쓰임이 결정되지만 세상의 빛은 그 누구에게도 조종되지 않습니다.
저절로 드러나는 빛 - 그것은 바로 “내 안에 사는 이”가 드러날 때입니다.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사도 바울은 물론 당시 육신적인 죽음을 의미하고 있고 영원한 삶에 대해 말씀하고 있지만 분명히 이중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내가 더 죽어야 내 안에 계신 그분이 더 드러날 수 있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말씀합니다.
그래서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아침에 조금 무거운 묵상이 되었지만 Watchman Nee목사님의 “나는 죽고 그리스도만”이란 말씀을 깊이 새기는 하루가 되었으면 하고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