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도 가려느냐
요6:66 “그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카카오 톡에 들어가 보면 친구에 shake라는 기능이 있습니다. 한번도 써 본 적은 없지만 처음에는 무슨 기능인지 몰랐는데 알고 보니 오랫동안 소식을 나누지 않고 별로 소통이 없는 그냥 명목상의 친구들을 정리해서 털어버리는 기능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보리떡 다섯 덩어리와 물고기 두마리로 오천명을 먹이신 후, 배불리 먹었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Welfare King(복지후생 담당 왕)으로 삼으려 몰려들었습니다. 요즘 표현으로 하면 포퓰리스트 정치인의 모습입니다.
하루하루 먹고 살기 쉽지 않았던 그들의 속셈은 예수님만 지도자로 삼으면 등따습고 배부를 수 있겠다는 계산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세상적인 목적의 “야합”에는 늘 배반의 영이 흐릅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생명의 떡”인 자신을 소개합니다. 그들이 온 것은 떡을 먹고 배부른 때문인데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영생의 떡, 생명의 떡을 먹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마리아 여인에게 생수를 소개했던 때와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관심을 가지고 주님의 말씀을 들었지만 군중은 인내심도 없었고 관심도 없었습니다.
영적인 말씀을 듣고는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이런 말씀을 받겠는가”하며 하나 둘 떠나가기 시작합니다. 마치 카톡의 Shake 기능으로 뿌리가 깊지 못한 친구들을 흔드신 모양새입니다.
삼삼오오 떠나는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보시던 주님이 제자들을 보고 묻습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분명코 그 질문에는 주님의 비장한 마음이 섞여있었을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물질의 복을 얻고 자신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교회를 다니고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Consumer Spirituality (소비자 영성)라고 부르기도 하는 “자기 편의주의”의 모습입니다.
조금이라도 불편하고 자신의 이익에 반하면 얼마든지 돌이켜서 편하고 쉬운 곳을 선택하는 소비자의 모습을 빗대어 표현한 현대판 Church-goer를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주님은 똑같은 질문을 하십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우리도 이 비장하고 심각한 질문 앞에 설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무엇 때문에 교회를 다니는가? 나는 무엇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는가?
그때 마치 우리 모두의 심령을 대변하듯 베드로가 주님의 질문에 답합니다.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온데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오 주여
이러한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게 하옵소서
그 고백 후에도 넘어졌던 베드로처럼
우리도 때로 넘어집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이
주를 떠나지 않고 주의 말씀을 붙들게 하옵소서!
주의 말씀만이 우리 발의 등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