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와 아직 사이
롬6:25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기다리는 것이 쉬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외교가에서는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이 약속시간을 잘 안 지키는 국가 원수로 외교적 결례를 일삼는 무례한 대통령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약속시간에 일부러 조금 늦게 가야 더 무게를 지닌다고 생각하는 이상한 “스타의식”을 지닌 사람이 있습니다. 푸틴이 그런 타입의 정치가라고 합니다. 꼭 30분 늦게 나타나거나 때로는 한시간 늦게 나타나 국가 원수들 간에 불편한 마음을 갖게 한다고 합니다.
성경의 기다림은 “이미와 아직” 사이에서의 기다림 입니다. 우리의 간구는 응답되어서 하나님의 시간(카이로스)에서는 이미 이루어졌지만 우리들의 시간(크로노스)에서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이미와 아직 사이의 기다림 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리이다”하고 기도하라 가르치십니다. 사도바울은 이러한 주님의 가르침을 해석해서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리라”고 권면합니다.
성경에는 이러한 이미와 아직 사이의 기다림에 따르는 두가지 다른 형태의 열매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로 오래 참음과 인내입니다.
오래 참음(long-suffering)은 성령의 열매이며 그 참는 대상이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사랑에 따라 나타나는 열매입니다. 사랑장으로 잘 알려진 고린도전서 13장에는 사랑의 가장 첫번째 성품으로 “오래 참고”를 지적합니다. 더 사랑하는 사람이 더 참고 더 기다리게 되어 있습니다.
한편 인내(patience)는 그 참음의 대상이 환경이나 상황입니다. 그래서 인내는 믿음에 따라 나타나는 열매입니다. 기도하고 구한 것은 받은 줄로 믿고 흔들리지 않는 인내를 요구합니다.
예수께서도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눅18:1) 말씀하시면서 과부의 강청하는 비유를 가르치십니다. 흔들리지않는 인내를 강조하신 것입니다. 믿음과 인내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우리들은 이러한 “이미와 아직”이라는 두 벽 사이에 서서 (겔22:30) “또 하나의 열매”를 바라며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기다림의 열매를 맺으며 이미와 아직 사이의 간격을 좁히고자 기도하는 사람들입니다.
오 주여
오늘도 이미와 아직 사이에
서서 기도합니다.
주여 돌아오소서!
슈바 아도나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