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나라에 엉뚱한 명령을 내리는 것으로 유명한 한 왕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임금이 한 신하를 불러 이상한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 우물 물을 길어 저기 밑 빠진 독을 가득 채우도록 하라.”
밑 빠진 독에 물이 채워질 리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충성스러운 신하는 오직 임금의 명령만 생각하며 밤낮으로 물을 길어 날랐습니다. 결국 우물 바닥이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우물 바닥에 무엇인가 번쩍이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것은 엄청나게 큰 금덩어리였습니다. 신하는 할 수 없이 임금 앞에 무릎을 꿇고 아룁니다.
“전하, 소신의 죄를 벌하여 주옵소서. 물이 다 말라버려 명을 받들지 못하였나이다. 결국 독에 물을 채우지 못하였나이다. 그러나 우물 바닥에서 이 금덩이를 건졌나이다.”
임금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습니다. “밑 빠진 독에 물을 채우겠다고 우물이 바닥나도록 수고했구려. 그대는 참으로 충성스러운 신하요. 그 금덩이는 그렇게 순종하는 신하를 위해 준비된 것이라오.”
엉뚱한 명령은 결국 명령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터무니 없는 명령임에도 순종 하는가에 포인트가 있었고, 순종하는 자에게 상급이 준비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헬라 철학의 태두라 할 수 있는 소크라테스는 최고의 현인으로 알려져, 요즘 식으로 말하면 젊은이들 사이에 최고의 인기를 끌던 스승이었습니다. 결국 이 때문에 모함을 받아 독배를 마시게 됩니다.
수없이 많은 젊은이들이 그에게 지혜를 배우고자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그는 가르치지 않고 계속 질문을 되물은 것으로 유명합니다. 한 제자가 다가와 묻습니다. “선생님 덕이 무엇입니까?”
소크라테스가 제자에게 되묻습니다. “너는 덕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제자가 답합니다. “덕은 넓은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자 소크라테스가 다시 묻습니다. “넓은 마음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이든 용납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사람을 죽인 사람도 용서하는 것이냐?” 이에 제자가 결국 꼬리를 내리며 말합니다. “잘 모르겠습니다.”
소크라테스는 결국 자신의 ‘무지’를 깨닫게 해준 것입니다. 그리고 그 유명한 명언을 남깁니다. “너 자신을 알라.” 아무 것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우리 자신을 깨닫는 것이 지혜요 철학의 출발점이라는 가르침입니다.
욥은 비극적인 상황에 하나님께서 침묵하셔서 자신을 버리셨다고 생각했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은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알고 계시지만 숨어서 나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숨어계신 줄만 알았던 하나님이 폭풍우 가운데 나타나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엉뚱한 질문이었습니다.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
첫번째 질문은 하나님께서 땅의 기초를 놓으셨는데, 그 때 네가 어디에 있었냐는 질문입니다. 두 번째 질문은 “바다가 그 모태에서 터져 나올 때에 문으로 그것을 가둔 자가 누구냐”고 물으십니다.
하나님의 엉뚱한 질문은 욥에게 숨돌릴 틈도 주지 않고 계속 됩니다. “네가 한 번이라도 아침에게 명령하여 동을 트게 한 적이 있느냐?”욥이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질문들을 속사포처럼 던지십니다.
“빛이 어디서 오고, 어둠이 어디로 가는지 아느냐? 눈 창고에 들어가 보았느냐? 우박 창고에도 가 보았느냐? 번개가 흩어지는 곳이나 동풍이 땅에서 흩어지는 곳을 알고 있느냐?”
하나님의 엉뚱한 질문은 우리가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것들이 바로 하나님의 일상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엉뚱한 질문은 우리에게 믿음의 신비한 영역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이 세상에 일어나는 수많은 일에 대해 우리가 이해할 수 없을 때, 보이지 않고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와 손길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신비를 기대하며 살아가는 것이 주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은 늘 우리와 늘 함께 하십니다. 주님은 우리보다 먼저 가셔서 우리의 길을 예비하시고,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안고 가십니다.
오 주여 우리는 무지하여서 주님의 섭리를 다 깨닫지 못합니다. 언제 어디에서 주님의 손길이 임할지 알 수는 없지만 예비하신 그 손길을 믿고 오늘도 걷습니다. 주님여 이 손을 꼭잡고 가소서 이 아침의 노래요 기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