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니아의 안수
주님께서 환상 가운데 아나니아에게 사울이란 청년에게 가서 안수하라고 하셨을 때
아나니아는 주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울에 대한 소문을 이미 듣고 익히 알고 있던 처지였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 때문에 우리 동료들이, 아니 우리 가족들 조차 얼마나 큰 피해를 보았는데... 하고
주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종용하시는 주님 앞에 순종할 수밖에 없었던 아나니아였습니다.
안수는 용서의 차원을 넘어 축복을 빌어주는 수준의 행위입니다.
피해자가 가해자를 응징하고 미워하기는 쉽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갑을 관계에 있어 을이 갑을 용서하고 축복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각박해진 사회에서 을이 규합해서 갑을 정죄하고 사회의 정의를 구현하는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상당히 후련한 대리만족을 느낍니다.
범죄자들을 사회에서 매장시키고 격리시키는 것이 필요할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 범죄자, 그 갑이, 하나님이 택하신 그릇이고 어떤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시기 위한 도구라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물론 그 판단은 하나님만이 내리시고 행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들이 그 판단을 내리고 우리가 응징하는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 주님의 처방은 단호하십니다.
“을”인 네가 가서 “갑”을 용서하고 축복하라.
가서 “안수”하라는 것입니다.
사울(큰자)에서 바울(작은자)로 바뀌어 가는 길에 가장 먼저 기억해야 할 사람이 아나니아입니다.
아나니아의 안수가 없었다면 사울의 눈에 비늘은 제거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 비늘이 제거됨으로 사울은 비로소 그의 죄악된 영혼을 바라보게 되었고,
세상과 종교를 바라보는 눈이 바뀌어 생명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죽이고 해를 끼치는 행위야말로
그리스도를 두번 십자가에 못박는 것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사울이 바울이 되는 과정에 있던 두 사람, 아나니아와 바나바는 주 안에서 진정으로 큰 자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야 말로 아나니아의 안수가 그리고 안개꽃과 같은 바나바가 필요한 시대입니다.
행9:12 “그가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